삶의 짐을 내려놓고 천상의 골퍼가 되고 싶은 곳
스톤 헤이븐의 18번 홀 그린 옆 묘지는 원래 성 마리아 성당 이었다.
무너진 성당 건물 안에도 묘지들이 들어와 있다. 영국의 일부 오래된 명문 클럽은 탈퇴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자리가 거의 나지 않는다. 회원중 누군가 세상을 떠나야만 가입할 수 있다고 한다.
스톤 헤이븐의 18번 홀 그린 옆 무너진 성당 속 묘비에도 역시 죽어야만 가입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에는 비석 하나에 한 사람이 아니라 한 가족 모두의 이름을 새기는 경우가 많다. 각 비석에 새겨진 가족사를 둘러보다 사연이 눈에 들어왔다.
어부였던 아버지는 여든을 넘겨 살았다. 그의 아내는 50대에 아들은 23세에 세상을 떠났다. 1940년대 초반 세상을 떠난 아들은 아마도 2차 세계대전 중 전사한 군인이었나 보다.
나이를 따져보니 어부는 40대에 아들을, 50대에 하늘로 보냈다.
고통의 바다에 그물을 던져 얻은 물고기를 들고 가족도 없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을 그 어부의 삶은 어땠을까 ? 혼자 살았던 생의 마지막 30년이 행복했을까 ? 가족과 함께 묻혀 있는 지금이 더 행복할까 ? 무덤의 십자가는 양지 바른 곳에 서서 고통의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967년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프로 골퍼 데이브 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후 그가 다녔던 골프장을 찾아다니며 유골을 뿌렸다. 초라한 9홀 코스의 프로였던 그의 아버지는 성질이 불같았는데 아들 마는 더 급했다.
부자가 함께 라운드를 하면 제대로 경기를 끝내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아옹다옹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후 마는 그의 모든 흔적을 찾아다니며 고인을 위로했다.
골프 코스에서의 인연은 혈연처럼 질기다. 달에서까지 골프를 쳤던 골프광인 우주항공사 앨런 셰퍼드의 유골 일부는 페블 비치에 묻혔다.
나는 오래된 골프 코스에는 어떤 정령이 있다고 믿는다.
골프 스윙대신 골퍼의 마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제임스 도슨이 쓴 <마지막 라운드>라는 책을 보고 나서다. 암에 걸린 아버지를 모시고 골프의 성지인 세인트 앤드루스로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골프기자의 이야기이다.
소설가 김주영 씨는 이 책에 대해 이렇게 해석했다.
아버지는 곧 죽어야 할 운명인 자신을 바라보면서 괴로워하는 아들에게 말했다. ” 인생이 우리에게 약속해주는 것은 슬픔 뿐이야. ” 그러나 아버지는 그 슬픔 속에서 기쁨을 찾아야 한다는 것, 실수로 가득한 골프 코스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골프 코스에서 우리는 희망, 욕심, 좌절, 분노 오만, 허풍,위선, 유혹등 인간 본연의 감정속에 내재 되어있던 감정의 소용돌이속에서 방황한다.
뜨거운 사랑의 열병을 앓는 청춘의 가슴처럼 골프장에서 한 사람의 존재는 결렬한 감정속에 불타 없어진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이 탄생한다. 코스에서 느끼는 이 감정은 결렬한 운동 후 희열의 경지에 이르는 마라톤의 ‘러너스 하이’ 보다 고차원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베스트셀러 <아직도 가야 할 길>의 저자인 심리학자 스콧팩은 “골프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성숙한 인간이 되는 연습 “이라면서 “결혼과 부모가 되는 것 다음으로 큰 인생의 배울 기회 “라고 했다. 종교에서 말하는 거듭남과 해탈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 라운드> 에서 부자는 올드 코스에서 골프를 즐기지 못한다. 추첨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올드 코스에서의 마지막 라운드는 그들 여행의 목적이었다 아들은 골프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라운드를 올드 코스에서 하게 하려 했다.
그래서 아들은 다른 수를 써서라도 골프를 할 방법을 찾아보려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른 방법은 원하지 않았다. 그가 평생 지켰던 골프의 정신을 마지막 라운드에서 어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올드 코스 페어웨이를 걸으며 마음속으로 샷을 날리는 것으로 여정을 마감한다.
인생의 끝이 임박해서 스코틀랜드로 마지막 여행을 떠나기를 바라는 골퍼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그 순간이 된다면 마지막 라운드는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 코스가 아닌 스톤헤이븐에서 마지막 라운드를 마치고 성 마리아 성당 묘지 옆 18번 홀 그린에 서면 고통의 바다를 지나 따뜻한 안식처에 온 느낌을 받을 것이다
절벽을 때리는 파도소리와 갈매기의 울음은 천산의 음악이라는 헨델의 아리아가 되고 우리는 삶의 짐을 내려놓은 천상의 골퍼가 될 것이다.